[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심화영 할머니 소리를 들어보세요.”1994년 국악의 해를 맞아 ‘충청의 소리-중고제를 되찾자“(중도일보)는 시리즈를 연재할 때 국악계의 한 분이 자신이 녹음해온 소리를 들려줬다. 심화영의 소리는 아주 맑고 담백했다. 꼿꼿한 선비가 연상되는 소리였다. 그가 말했다. ”이게 중고제예요.“
머리털이 쭈뼜 서는 충격이었다. 중고제가 음반에 박제된 과거의 소리가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생생하게 살아있는 소리임을 심화영의 소리는 일깨웠던 것이다.
심화영은 큰오빠 심재덕에게 소리를 배웠다. 심재덕은 아버지 심정순의 소리를 이었으니 뛰어난 음악성은 ‘심정순 가문’의 내력인 듯하다.
내포 예맥 가운데 ‘심정순 가문’의 봉우리가 우뚝하다. 심정순은 서산 읍내동 학돌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서 판소리 재담 가야금 양금 단소 등을 두루 배웠다. 1908년 서울로 진출해 극장 무대의 스타로 떠오른다.
1910년대 초반 서구식 극장인 장안사 소속으로 그의 이름을 따 ‘심정순 일행’을 꾸려 지방순회를 다닐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레코드판이 처음 보급되던 시기 음반의 대부분을 심정순 가문이 녹음했다고 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라디오 신문 등 신문물을 활용해 판소리 등을 보급하는 선구자적 면모도 보였다.
매일신보에 판소리 사설을 연재한 것이 특히 눈에 띈다. ‘강상련(심청가)’ ‘연의 각(흥부가)’ ‘토의 간(수궁가)’을 연재했는데 듣는 판소리에서 읽는 판소리로 변화를 꾀한 것은 일제강점기 우리의 것을 보전하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소리뿐이 아니다. 심정순은 소리는 물론 춤 연주에도 능했다. 심정순의 조카가 가야금 병창, 산조의 명인 심상건이다, 심상건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심정순 밑에서 성장하면서 그의 기예를 물려받아 일가를 이뤘다.
장남 심재덕은 소리와 가야금 등 각종 음률에 두루 능했고 장녀 심매향은 가야금 병창 춤에 능했다고 한다. 차녀인 심화영은 소리와 더불어 춤도 뛰어나 그의 승무는 충남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심화영의 승무는 일반적인 승무와는 다르다. 대부분의 승무는 엎드려서 시작하지만 그의 승무는 선채로 시작한다, 의상도 흰색이나 분홍색이 아닌 미색 저고리에 남색치마이고 장삼도 흰색이 아닌 검은색이다. 큰 오빠 심재덕으로부터 전해지는 가문의 예풍일 텐데, 소박하고 간결한 몸짓이 중고제와 닮았다.
가문의 소리가 중고제인데 가야금 병창을 하든지 잡가를 부르든지 중고제 창법이 어디 갈 리 없다, 그 소리에 익숙하니 어떤 악기를 연주하든 연주에 중고제 스타일이 스밀 수밖에 없다. 중고제 소리에 중고제 연주에 맞춰 추는 춤이니 춤 또한 중고제 스타일일 수밖에 없다.
'심정순 가문'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이 점이다. 충청의 말투와 호흡으로 충청의 소리, 충청의 음률, 충청의 몸짓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심화영 소리는 판소리 제자 이은우가, 춤은 그의 손녀이자 전수조교였던 이애리가 보존회를 만들어 이어가려 노력하고 있다.
심재덕의 딸이 가수 심수봉이다. 심수봉의 노래 ‘백만송이 장미’를 들을 때 빠르고 담담하게 부르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하는 후렴부분이 내 귀에는 중고제 소리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