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내포는 세계로, 세계는 내포로’라고 말하려면 빠뜨려서는 안 되는 곳. 고대 한반도에 세계로 열린 포털 같은 곳. 당진이다.
당진이라는 이름은 먼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반도와 중국 대륙 사이의 서해 뱃길이 열릴 때 산둥성과 내포 지역은 가장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입지가 좋은 이 해안에 나루터가 생겼을 것인데, 백제 때 벌수지현(伐首只縣) 또는 뱃재(船峴)였다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당진현(唐津縣)으로 바뀐다.
‘당나라로 가는 배가 뜨는 나루’라고 해서 당진이라고 했다지만 이 지역에서 백제시대 유물이 많이 출토되는 데다 백제유물과 함께 중국 관련 유물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훨씬 옛날부터 중국과 교류가 활발했던 것 같다.
한반도 서해안에서 중국 산둥반도로 직선으로 건너는 동서바닷길을 황해횡단항로라고 한다. 육로로는 고구려에 가로막혀 있던 시대 횡단항로를 따라 중국을 가거나 중국에서 한반도로 오기에 당진은 최적의 항구였을 것이다.
어쨌든 당진현으로 바뀌던 이 시기가 ‘당진 역사의 전성기’일 것이다. 당나라 뱃길을 따라 배가 드나드는 곳은 한두 곳이 아니었다.
당진포(고대면 당진포리)가 대표적이지만 ‘큰 포구’라는 한진(大津. 송악읍 한진리)도 있고 진관(고대면 진관리 관동마을)도 있다. 당나라로 가는 나루길(津)이 있고 관서(館)이 있어 ‘진관(眞館)’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당나라로 가는 사람들은 당진포와 한진을 거쳐 당으로 들어가고 또한 그들은 당나라 문물을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불교와 서역·중국의 문화와 사람의 교류가 이들 나루터에서 이루어졌으리라.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가 당진 나루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한국 사상사의 맨 윗자리에 올라있는 고승 원효와 의상은 육로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입국하려다 제지당하고 배를 타기 위해 당진으로 왔다고 한다.
원효는 직산에서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당나라 수행을 접었다 하나 의상은 당진에서 배를 타고 건너간 것이 문무왕 1년(661년) 이었고 10년 만인 671년 귀국할 때도 이 뱃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당시 당진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설화가 있다. 고대면 진관리 영파산에 영랑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 사찰의 창건에 여러 설화가 있는데 당나라를 세운 당태종의 딸이 등장한다.
당태종의 딸 영랑공주가 아도화상과 당진을 둘러보다 채운포의 경관에 감탄하여 돌아간 뒤 아버지 당태종을 졸라 이곳에 절을 짓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 영랑사라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영랑공주가 의상스님을 만나 원효스님의 깨달음 이야기를 듣고 감명 받아 해동에 불법이 융성해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옛 백제 땅에 주둔해 있는 당 수군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아도화상에게 부탁해 절을 세웠다는 설화다.
물론 당태종의 딸 중에 영랑공주는 없다. 하지만 설화는 당진이 당나라 왕실도 관심을 가질만한 매우 중요한 위치였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아도화상은 신라에 불법을 전한 승려다.
당진이라고 해서 당나라하고만 교류했을까. 베트남, 필리핀 등 남쪽 나라의 무역선도 오갔을 것이다. 당시 동서 교류의 중심 항구인데다 남방에서 북방으로, 북방에서 남방으로 이동하는 통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진은 세계로 열린 한반도의 포털이었던 것이다.
동서 뱃길 나루터로 번성하던 당진이 부활하고 있다. 서해안 시대의 개막과 서해고속도로가 뚫리면서 기지개를 펴고 있는 것이다. 철강도시로 입지도 단단해지고 있다.
고대 한반도에 세계로 열린 포털이었던 당진. 그 포털을 다시 한 번 활짝 열어줬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