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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 10년 내포문화 돌아보기] 29. 영조가 하사한 땅에 충청도 53개 군현서 한 칸씩 지은 추사고택

추사 김정희 ①예산은 점잖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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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2.12.06 13:53
  • 기자명 By. 안순택 기자
▲ 추사고책 옆 추사기념관에서 만난 김정희 선생 초상화. 추사가 세상을 뜨자 친구 권돈인은 화원 이한철에게 이 추사의 초상을 그리도록 했다.
▲ 추사고책 옆 추사기념관에서 만난 김정희 선생 초상화. 추사가 세상을 뜨자 친구 권돈인은 화원 이한철에게 이 추사의 초상을 그리도록 했다.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날아갈 듯한 기와집이 손님을 맞는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ㄱ자 남향집인 사랑채다. 안마당 화단 한가운데 네모난 돌기둥이 서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金正喜. 1786~1856)이 만들어 세워놓았다는 해시계다.

사랑채를 지나 ㅁ자 집인 안채로 이어지는 이곳은 ‘추사고택’이다. 추사의 옛집이니 추사 김정희 선생이 나고 자란 곳이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결혼했다. 영조는 김한신을 사위로 맞으면서 그를 ‘월성위’에 봉했고, 서울 통의동 백송나무가 있던 동네에 월성위궁을 내려주었다.

영조는 또 예산군 용궁리 일대 땅을 하사하면서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각 고을마다 한 칸씩 건립비용을 내어 53칸짜리 집을 짓게 했다. 이것이 오늘날 추사고택이다.

추사의 직계손이 끊어지면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일부는 헐리고 일부는 변형이 꽤 심하게 된 것을 1970년대에 53칸 집을 반으로 줄여 복원했다. 옛날의 화려함은 많이 가셨지만 대왕 사위집으로서의 품위는 잃지 않고 있다.

▲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 추사 선생은 이곳에서 나서 자랐다.
▲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 추사 선생은 이곳에서 나서 자랐다.

추사는 1786년 6월 3일 이곳에서 아버지 김노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추사가 태어날 무렵 뒤편 우물물이 줄어들고 뒷산인 용산과 팔봉산 나무들이 시들시들하다가 그가 태어나자 다시 샘이 솟고 나무도 살아났다고 한다. 이처럼 추사는 예산 땅의 정기를 듬뿍 받고 태어났다.

예산 땅의 정기를 타고 나서였을까, 아니면 고향의 정겨움 때문이었을까. 추사는 예산을 좋아했다. 그는 ‘예산’이라는 시를 지어 이렇게 읊었다.

“예산은 점잖아라, 팔짱을 낀 듯/ 어진 산은 고요하여 조는 것 같네/ 사람이 보는 바는 똑같지마는/ 홀로 마음이 가는 곳이 있다오/ 너른 벌은 진실로 기쁘거니와/ 좋은 바람 역시 흐뭇도 하네/ 벼가 자라 이 둑 저 둑 묻어버리니/ 고른 것이 마치 한 사람 논 같네/ 서너 줄로 늘어선 가을 버들은/ 여위여위 길 먼지 다 덮어 썼네/ 이것저것 모두가 그림 같은 모습인데/ 해 붉은 저녁 빛은 저 먼 하늘에.”

추사고택의 뒷산인 오석산에 작은 절 화암사가 있다.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중건한 이후 김씨 문중이 가문의 사찰처럼 가꾸어온 절이다.

▲ 추사는 화암사 뒤 병풍바위에‘시경(詩景)’이라는 글씨를 새겨놓았다. ‘시흥이 절로 일어나는 경치’라는 뜻인데, 글씨는 중국 송나라의 시인 육방웅의 것이다. 추사는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갔을 때 스승으로 모셨던 옹방강으로부터 이 글씨 탁본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를 이곳에다 새겼다. (사진=충남도 제공)
▲ 추사는 화암사 뒤 병풍바위에‘시경(詩景)’이라는 글씨를 새겨놓았다. ‘시흥이 절로 일어나는 경치’라는 뜻인데, 글씨는 중국 송나라의 시인 육방웅의 것이다. 추사는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갔을 때 스승으로 모셨던 옹방강으로부터 이 글씨 탁본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를 이곳에다 새겼다. (사진=충남도 제공)

추사는 화암사 병풍바위에 ‘시경(詩景)’이라는 글씨를 새겨놓았다. ‘시흥이 절로 일어나는 경치’라는 뜻인데, 글씨는 중국 송나라의 시인 육방웅의 것이다. 추사는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갔을 때 스승으로 모셨던 옹방강으로부터 이 글씨 탁본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를 이곳에다 새겼던 것이다.

또 그 옆에다가 ‘천축고선생댁’이라는 각자도 새겼다. ‘천축 나라(인도)의 옛 선생의 집’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 집’, 다시 말해서 ‘절집’이라는 말이다. 추사의 글에는 언제나 이런 상징과 은유가 은은히 배어있다.

추사는 절 뒷산 큰 바위에 ‘소봉래’라고 새겨 오석산을 금강산에 비겼고, 화암사 요사채의 누마루를 ‘시경루’라고 이름 짓고 여기에서 독서를 하고 글씨를 쓰고 시를 짓곤 했던 것이다.

추사에게 예산은 미소 짓게 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죽어서도 예산에 묻혔다. 추사고택 옆에 그의 묘소가 있다. 묘소 앞에 기품 있는 다복솔 한 그루가 서서 찾는 이들을 맞아준다.

세간에는 추사를 장사지낸 곳이 과천의 과지초당 뒷산 아버지 김노경의 묘소가 있는 곳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예산으로 이장했다는 설이 퍼져있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이야기다. 추사를 장사지낸 곳은 지금의 그 자리다. 후손 김승렬이 쓴 묘비문에 이렇게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병진년 10월 10일 갑오에 졸(卒)하여 예산 용산의 동쪽 언덕에 두 부인(한산 이씨, 예안 이씨)과 합장했다.”

김정희 이름 석 자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추사체라면 배움이 없이도 알고 있다. 우리 역사에 그런 인물이 몇이나 될까.

옛집의 이름이 주인의 이름을 따 ‘김한신 고택’이나 ‘월성위 고택’이 아니라 ‘추사고택’이 된 것은 추사가 경주 김씨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인물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포사람, 충청사람들은 김정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예산에 가면 추사 김정희 선생의 향기에 흠뻑 취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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