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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 10년 내포문화 돌아보기] 26.' 배교하면 살려주겠다'는 조정의 권고를 끝까지 거부한 김대건 신부

천주교 못자리 ⑥한국 첫 사제 성 김대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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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2.11.15 13:23
  • 기자명 By. 안순택 기자
▲ 어린이들과 어울린 프란치스코 교황과 김대건 신부 상. 솔뫼성지 입구에 조성돼 있다.
▲ 어린이들과 어울린 프란치스코 교황과 김대건 신부 상. 솔뫼성지 입구에 조성돼 있다.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내포가 한국 천주교회의 못자리라면 이곳에서 싹이 튼 모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모는 김대건 신부일 것이다.

한국의 첫 사제라는 의미에 더해 세계 교회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이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는 김대건의 사제 서품과 귀국으로 비로소 명실상부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 김대건 신부
▲ 김대건 신부

김대건은 1821년 아버지 김제준과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김대건이 태어난 곳이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지금의 솔뫼성지다. 어렸을 적 이름은 재복(再福)이었다. 재복은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로 옮길 때까지 일곱 해를 솔뫼에서 살았다.

비록 솔뫼에서의 삶은 짧았지만 증조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등 순교자들의 삶이 밴 이곳에서 재복은 사제품을 받고 순교하기까지 그의 삶을 채웠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배웠을 것이다.

15살 되던 1836년 12월 재복은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보내졌다. 함께 선발된 최양업, 최방제와 발로 걸어서 압록강을 건넜고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초인적 역정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가 마카오에 임시로 세운 조선신학교에서 천주교 신학과 철학, 라틴어 등을 배웠다. 이곳에서 재복은 대건으로 이름을 바꾼다. 김대건은 신학뿐 아니라 라틴어, 역사, 프랑스어와 중국어 등 광범위한 새 학문을 접하고 열성적으로 배웠다.

그러나 함께 간 동료 최방제가 열병에 걸려 죽었고, 고국에서는 아버지가 기해박해 때 순교하는 아픔도 겪었다.
1845년은 한국 교회에 역사적인 해다. 김대건은 8월 17일 중국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니 한국 최초의 신부가 탄생하는 것이다.

사제가 된 그는 그해 8월 31일 프랑스 선교사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태우고 서해를 건너 귀국하게 되는데 도중에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하는 수난을 겪고 가까스로 강경에 도착한다. 고생은 되었지만 바닷길을 통한 선교사의 통로가 확보된 셈이다.

하지만 보다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백령도 근해를 탐색하다 순위도에서 체포되고 만다.
8개월 동안 수 백리 길을 오가며 미사를 집전하는 등 열정을 바쳐 사제로서의 헌신을 다했지만 여기서 모든 게 멈추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외국어와 지도 제작 등 그가 보여준 신지식에 깊은 존경심을 갖고 죽음만은 면하게 하려는 기류도 있었다.

헌종이 대신들에게 물었다. “김대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영의정 권돈인이 말했다.“본래 조선인으로서 본국을 배반하여 다른 나라 지경을 범하였으며 스스로 사학(邪學)을 칭하였고 위험한 말로 두려움을 조장하니 뼈가 오싹하고 쓸개가 흔들립니다. 김대건 일은 한 시각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배교하면 살려주겠다는 조정의 권고를 끝까지 거부한 김 신부는 체포된 지 석 달 만인 9월 15일 사형을 선고받는다. 참수형은 사형선고 바로 다음날 집행됐다. 그는 죽기 전 다음과 같은 말을 신도들에게 전했다.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이 내게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당년 25세. 참으로 아까운 나이였다.

1984년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 103위 순교자들을 시성했다. 이 때 김대건 신부는 첫번째로 성인 반열에 올랐다.

천주교는 당시 조선에 종교만이 아니었다. 학문이었고 철학이었으며 세계로 열린 창이었다. 18~19세기 조선은 천주교란 창을 통해 서양과 만났고, 서양은 선교사들의 눈으로 조선을 알게 됐다.

김대건은 그 점에서 단순한 신앙인에 그치지 않는다. 선진 학문과 사상에 눈뜬 글로벌 리더였고, 민중의 삶을 바꾸려고 한 개혁운동가였던 것이다.

▲ 술뫼성지에 조성된 김대건 신부 상
▲ 술뫼성지에 조성된 김대건 신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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