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여사울이란 이름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같다’ ‘비슷하다’ 는 의미의 한자 여(如)를 써서 “부유한 기와집이 즐비하여 마치 서울 느낌이 든다”(如서울)에서 유래됐다고 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한자 지명이 호동리(狐洞里)인 것을 보면 여사울은 여우골이란 뜻이 아닐까 싶다. ‘여수골’ 또는 ‘여수울’로 불린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강세정은 ‘송담유록’에서 한 발 더 나간다. 그는 ‘여소동(余蘇洞)’ 또는 ‘야소동(邪蘇洞)’으로 썼다. ‘야소(邪蘇)’ 또는 ‘야소(耶蘇)’는 예수의 한자식 표기이다. 즉 여사울은 예수쟁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고 썼던 것이다.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내포의 천주교회가 이존창을 통해 여사울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그런데 이존창은 특이한 행보를 보인다.
그는 여러 번 잡혀가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때마다 그는 적극적으로 배교를 맹세하고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충청도관찰사 박종악은 그의 수기에 이존창의 배교를 상세히 적어 놓았다.
“이존창의 말을 들어보고 그의 모습을 보니, 얼굴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어 사학을 떠나 정도로 돌아올 것을 전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제 입으로 예수를 배척하고 모욕하며 소라 하고 말이라 하였으니, 그가 진심으로 잘못을 고친 것이 이처럼 분명합니다.” 정조는 이 말을 듣고 이존창을 석방하라는 밀지를 내려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이존창의 배교는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가 배교를 하고 풀려날 때마다 신자는 늘고 교세는 더 커졌다. 배교를 하고 여사울을 떠난 그는 홍산(鴻山)으로 넘어가서 새로운 포교의 거점을 세우기도 했고 전라도 고산으로 넘어가 주문모 신부를 보좌하기도 했던 것이다.
1795년 이존창을 붙잡은 것은 정약용이었다. 알려졌다시피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였다. 천주교 신자가 천주교 신자를 붙잡은 셈인데 이때의 체포는 주문모 신부를 도피시키기 위한 의도적 자수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존창은 1801년 체포돼 서울로 이송되었다가 2월 28일에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수되었다. 그때 나이 42세였다.
그의 머리는 여섯 번 칼질 끝에야 땅 위로 굴렀다고 한다. 희광이가 사형수의 고통을 가중시키려고 장난쳤기 때문이다.‘추안급국안’에 사형선고문이 실려 있다.
“오래 감옥에 갇혀 선처가 불가능한 처지에서도 풀어주었는데 새로워지기를 약속하고도 고쳐먹지 않았다. 만 번 죽여도 아깝지 않다.”
이존창은 여러 번 배교 행동을 반복했다. 자신을 소나 말에 견주고도 돌아 나와서는 교회 재건의 선봉에 서곤 했다. 그의 배교는 일신의 안위보다 교회를 수호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달레는 이렇게 썼다. “이존창 루도비코는 첫 번 박해 때 나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있어서의 복음 전파에 가장 많이 활동한 이들 중 한 사람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오늘 우리 교우들 대부분이 그때 그가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내포와 그 이웃 여러 고을에서는 그에 대한 기억을 우러르고 있다.”
조선 최초의 신부 두 사람이 그의 집안이었으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그의 조카딸의 손자요,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그의 조카의 손자였다.
여사울에는 이존창 말고도 김광옥과 그의 아들 김희성 같은 순교자도 있다. 부자가 다 순교의 길을 걸었는데 2014년 교황이 한국에 왔을 때 이들을 복자품에 올렸다.
홍병주(베드로)와 홍영주(바오로) 형제도 빼놓을 수 없다. 기해박해 때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고 해서 붙잡힌 형제는 1840년 홍병주가 참수형을 받은 이튿날 동생 홍영주도 당고개에서 참수되었다. 형제는 모두 성인 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