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천장사는 단출하다. 탑 하나 석등 둘, 인법당, 산신각, 공양간, 요사채, 작은 선원, 지장전이 전부다.
20년 전 왔을 때는 ‘ㄷ`자 모양으로 머리를 맞댄 절집이 전부였다. 불안해 보이는 탑이 하나 있으니 절 같기도 하고, 절이라기보다는 한 100년쯤 된 집 같기도 했다. 이름도 ’천장암‘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경허가 천장암을 찾은 이유는 형 태허가 주지로 있고 어머니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꼭꼭 숨어 공부밖에 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 보임처(保任處)로도 맞춤이었을 것이다.
보임(保任)은 찾은 본성을 지킨다는 뜻이다. 견성하여 참된 나를 발견한 뒤에는 참된 나를 보호하고 지켜나가는 생활을 하는데 이게 보임이다. 경허는 특히 자신의 깨달음을 인가해줄 스승이 없었다.
선가에서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해도 눈 밝은 선지식으로부터 깨달음의 경지를 인가받지 못하면 아무도 그 사람의 깨달음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깨달음의 경지는 깨달은 사람만이 안다. 부처는 보리수 아래에서 반짝거리는 새벽 별빛을 보고 도를 깨우쳤다. 그 새벽 별빛은 그 별빛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별빛을 보는 것과 별빛을 설명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별빛을 설명으로 보여주거나 보려하면, 설명하면 할수록 별빛의 실체와는 멀어진다. 그래서 깨달음은 눈 밝은 선지식의 인가가 있을 때만 비로소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인가해줄 스승이 없다. 선의 심법의 맥이 서산대사 이후 끊어지고 말았으니 스승이 있을 리 없었다.
선의 심법이란 무엇인가. 부처가 영산에서 설법을 할 때 허공에서 꽃잎이 눈처럼 흩어져 내렸다. 부처는 갑자기 말을 끊고 꽃 한 송이를 주워 그 꽃을 들어 보였다.
사람들은 갑작스런 부처의 침묵과 꽃을 들어 올린 뜻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유독 가섭 존자만이 빙그레 웃었다.
꽃 한 송이를 들어보였을 때 그 꽃을 문자나 교리로 설명하려 하지 않고 다만 미소로 설명하여 보인 가섭에게서 부처는 자신이 어떤 설법으로도 표현해 낼 수 없었던 진리를 가섭이 깨달았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부처는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의 말을 남긴다.
“나에게는 더할 수 없이 바른 진리의 가르침(正法眼藏), 끝없는 진리의 자유로운 경계(涅槃妙心), 모든 것이 있으며 모든 것이 또한 없는(實相無相), 깊고 묘한 길(微妙法門), 글자로 표현될 수 없는(不立文字), 가르칠 수도 없어 따로 전하여야 할(敎外別傳) 진리의 법이 있다. 이를 가섭에게 전한다.”
부처에게 무엇이 따로 있어 이 진리를 글자로써는 표현할 수 없고, 가르쳐줄 수도 없고, 있으면서도 없는 법(法)이라 하였을까.
그리하여 부처는 가섭에게 진리를 말이나 가르침으로 전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 준 것이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 여기서부터 부처의 가르침 이외의 심법(心法)이 따로 전해지게 되었다.
경허는 자신의 깨달음이 부처의 마음인지 아닌지, 모자람이 없는지 스스로 확인하고 또 확인했을 것이다. 자신이 친필로 써놓은 ‘염궁문(念弓門)’ 글자 아래에서 생각의 화살을 쏘고 또 쏘았을 것이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생각이 없는 곳, 무념처(無念處). 그곳을 생각의 화살로 명중시켰다. 자신의 깨달음을 다시 확인한 그는 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오도가(悟道歌)를 불렀다.
“홀연히 고삐 뚫을 곳이 없다는 소릴 듣고/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이네/유월 연암산 아랫길에/들사람 일없어 태평가를 부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