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님! 사주 볼 줄 아세요?”
이것이 내가 출가하고 가장 많이 사람들에게서 들어온 질문입니다. 출가하고 처음으로 속가 집에 갔을 때 주변에 어른 분들이 오셔서 조심스럽게 물었던 말이 ‘공부 많이 했으면 좀 가르쳐 줘요’였습니다. 그 말은 그냥 받아들이면 공부한 부처님 법을 알려 달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으나 그분들의 눈빛에서 원하는 것은 다른 의미였습니다.
스님이 되어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를 모르는 사람이나 수행을 하면서 곁들여서 사주 공부를 한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묻는 말이 그것입니다. 내가 시드니에서 몇 년을 학생들하고 살아왔는데 그들 가운데도 종교를 막론하고 친해지고 나면 살며시 묻는 것이 ‘손금 볼 줄 아세요?’ 또는 ‘관상은?’입니다. 지금은 내가 그런 것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묻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정말 답답한 사람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것들을 보거나 관심이 있어 하는 것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약한 부분이 있어서 어디엔가 묻고 싶고 쉬운 방법으로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심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궁금하고 답답했던 것을 알고 나면 그 말처럼 결과가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지 어떠한 종교보다 시원한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상컨대 어떤 고상하고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도 정말 잘 보는 사람이 있다면 모르게라도 보고 싶을 겁니다. 정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도 누가 재미 삼아 봐주면 그냥 봐봅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보고 났을 때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은 들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것이 말처럼 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봐준 사람을 찾아가서 싸워야 하나요? 아마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결과에 대해서 들었지만, 그 답이 100% 진짜라고 해도 결과가 그대로 나타나기까지는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움직인다든지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든지 등의 많은 경우의 상황이 발생합니다. 마치 고추를 심었는데 몇 달 지나면 따먹기 시작을 할 건데 물도 안 주고 가꾸지 않고 내버려 두면 고추가 잘 자라서 열릴까요? 차를 몰고 뉴캐슬을 가는데 1시간 반이면 충분히 가는 것을 차가 도중에 문제가 생기면 그 시간에 갈 수 있나요? 아닙니다.
그리고 나쁜 결과를 미리 들었을 때는 더 난감합니다. 신경이 더 쓰이지요. 그러다 보면 평소에 그냥 하던 일들도 잘 안 됩니다. 그러다 보면 들었던 것보다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럼 운명은 정해져 있나요? 아닌가요?’ 그때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태어났으므로 언젠가 죽는다든지 몸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먹어야 산다든지 이런 기본적인 틀은 있는데 그 외에 자신의 의지나 노력 그리고 주변 상황에 따라서 변 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셀 수 없이 놓여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사주는 5천 년이 넘는 통계학이어서 누구나 깊이 있게 공부하면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손금이나 관상도 각자의 마음 씀에 따라서 변해갑니다. 우리의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살아갈 맛이 나겠습니까? 죽는 날짜를 안다면 그 날짜까지 제대로 자기 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요? 병원에서 암 등의 병으로 살 수 있는 남은 기간을 알려주면 많은 환자가 그때부터 병이 더 급속도로 악화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겨내고 살아남은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즐거움이 있는 것은 내일을 모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잘 쌓으면 살아온 인생이 아름답고 미래의 확실한 걸음이 됩니다. 사주나 관상 그리고 손금 같은 것들도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마음에 새겨진 선들이 가장 중요합니다. 잘 가꾸어야 합니다.
어제는 오늘의 밑거름
오늘은 내일의 토양
내일은 우리의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