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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일상의 저축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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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4.07.02 17:10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핸드폰에 알림 문자 한 줄이 떴다. 작년 이맘때 들어놓은 일 년짜리 적금이 기간 만료되었단다. 원래 예금이든 적금이든 도통 문외한이건만 그래도 모으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 시작했더니 어느새 만기에 이르렀다. 적금 개설 첫날, 자동이체를 걸어놓은 후 잊고 살았는데 여간 반가운 문자가 아닐 수 없다.

적금을 타면 가장 먼저 뭘 할까? 시작할 땐 몇 번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남편의 차가 오래되고 낡았으니 선심 쓰듯 돈 봉투를 던져주며 어깨를 으쓱해 볼까? 한 사람 들어서면 딱 맞는 작은 원룸에서 생활하는 아들 녀석의 방 평수를 늘려볼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즐거운 한나절을 보내다 문득 지난날 저축에 관한 이야기 하나가 떠 올랐다.

오래전 친정엄마가 칠순에 막 접어들 때였다. 날이 점점 여름으로 치닫던 어느 날 집 뒷밭에 들깨 모종을 심으러 갔던 엄마가 쓰러진 일이 있었다. 열사병이었다. 함께 일하던 아버지가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마침 옆집에 사는 아저씨가 이 광경을 보곤 달려왔고, 잠시 망설임도 없이 차에 태워 병원으로 내달렸단다. 그 덕에 엄마는 그해 가을 깻단을 수확했고 지금껏 살아계실 수 있었다.

우리 자식들은 옆집 아저씨를 두고두고 감사해했다. 그분의 발 빠른 기동력이 없었다면 최악의 경우를 맞이할 수도 있었을 상황 아니었던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밭일하다 쓰러진 터라 손이고 발이고 온통 흙투성이였던 엄마는 혼절하면서 토하기까지 해 차 안이 엉망진창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한마디 불편한 내색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분의 지론에 의하면 엄마가 종종 자신에게 저축을 많이 해 놓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울에서 의류 사업을 하다 부도를 맞고 도피하듯 이곳 시골, 우리 옆집으로 이사 왔을 때 그는 한없는 막막함에 에둘러 지냈다고 했다. 가족들과도 떨어져 혼자 꾸린 살림이 오죽 어설펐을까. 그때 엄마는 늘 식구처럼 옆집을 챙기곤 했다. 음식을 나누고 정을 나누면 식구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뜨끈한 밥 한 그릇, 김치 몇 포기, 찌개를 끓여도 담장 너머로 한 냄비씩 전해주곤 했다. 마당에 불판을 올려 삼겹살을 굽는 날이면 기꺼이 불러 함께 저녁을 먹곤 했던 시간이 아저씨에게는 고마움의 산물로 저축이 되었단다. 그동안 엄마에게 얻어먹은 밥값을 이제야 돌려주었다며 겸손해하셨다. 아저씨에게 들은 저축이라는 단어가 특별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이상 일상을 누리면서 주고받은 도움이 누구에게든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잠깐의 고마움으로 스쳐 지났을 수도, 또 다른 이에게는 저축으로 바뀌게 하는 장치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며칠 전 일하는 유치원에서 아이가 다쳤다. 다섯 살 난 녀석이 장난치며 뛰다가 넘어진 것이다. 입술이 붕어 입처럼 퉁퉁 부었다. 보건실에 연락해 치료하고 나니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극도의 정신적 압박감으로 몰려왔다. 그러나 아이 엄마는 개구쟁이 아들 때문에 많이 놀라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는 하루 중 가장 먼저 유치원 문을 두드리고 가장 나중까지 교실에 남아 엄마를 기다렸다. 나는 늘 그 아이가 안쓰러워 자주 근무 시간을 넘어서까지 같이 있어 주곤 했다. 시작은 선행이었으나 결국 지나고 보니 내 마음의 저축이 아이 엄마에게 가 닿지 않았나 싶다.

일상에서 오늘도 자잘하게 선행을 저축한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나의 시간을 투자해 선뜻 나섰을 때 희생했다고 생각하기보다 훨씬 더 큰 만족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해 받은 그 선행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도 옮겨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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